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카가와 히데마사 (문단 편집) == 역사 == 아버지와 함께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이었다. 노부나가가 죽은 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가신이 되었다. 1583년 [[시즈가타케 전투]]에서 [[사쿠마 노리마사]]의 공격을 받아 아버지 [[나카가와 기요히데]]가 전사하자, [[셋쓰 국]] 이바라키 5만 석의 영주가 되었다. 1584년에는 [[고마키·나가쿠테 전투]]에 참여했고, 1585년 시코쿠 정벌에서도 공을 세워 [[하리마 국]] 미키 6만 5천여 석을 추가로 하사받았다. 1587년 [[규슈 정벌]]과 1590년 [[오다와라 정벌]]에도 참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에 8군으로 참전하였으나 그해 수원에서 매를 사냥하다 조선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후 행적에 대한 기록에 대해 일본과 한국 ‧ 중국이 서로 다른데 일본 측 기록인 '일본전사 조선역'에는 1592년 11월 27일 [[수원]] 인근에서 매사냥 중 조선군의 매복에 걸려서 전사했다고 되어있다. 그 해 11월에는 [[권율]]과 최철견이 이끄는 조선군이 [[독산성|독성산성]]에 주둔하며 유격전을 벌이며 한양으로 북상하는 중이었으므로 아마 이들에게 공격받은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엔 영지가 몰수될 것을 우려해 이 사실을 은폐하고 정찰 중에 매복에 걸려 죽었다고 거짓보고하였으나 매사냥을 하던 사실이 히데요시에게 발각되어 진노를 샀다. 그러나 아버지 기요히데의 공적으로 인해 동생인 히데시게가 영지를 상속하게 되었고 다시는 헛되이 사망하지 말라는 주의를 받는다. 그런데 선조실록을 보면 평수정(平秀政, 平秀正)에 관한 기사가 3번 등장하는데[*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205020_004|선조실록 113권, 선조 32년 5월 20일 정묘 4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205024_001|선조실록 113권, 선조 32년 5월 24일 신미 1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208009_003|선조실록 116권, 선조 32년 8월 9일 을유 3번째기사]] ] 여기 나오는 평수정(平秀政)은 나카가와 히데마사의 한자발음인 중천수정(中川秀政)을 조선과 중국에서 다르게 부른 것으로, 일본 무장들이 헤이지(平) 가문의 일원이라고 밝히던 것에서 유래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인 [[풍신수길]](豊臣秀吉)을 평수길(平秀吉), 고니시 유키나가인 [[소서행장]](小西行長)을 평행장(平行長), 가토 기요마사인 [[가등청정]](加藤淸正)을 평청정(平淸正)이라 기록한 것과 같다. 중국 기록에서는 조선에 파견된 명 장수 형개(邢玠)가 집필한 '경략어왜주의(經略御倭奏議)'에서 평수정이 등장한다.[* 단 경략어왜주의의는 명 지휘관들의 보고를 받고 형개가 집필하였는데 거짓보고와 오류도 포함되어 있다.] >사은사 한응인(韓應寅)의 서장은 다음과 같다. > >"신들이 형 군문(刑軍門)에게 나아가 행례(行禮)를 하고 나서 '''평수정''' 등 61인을 해송(解送)하였습니다. 황상(皇上)이 오문(午門)에 친히 나아와 포로들을 바치는 일이 끝난 뒤 하례를 받았는데, 신들도 하례의 반열에 참석했습니다. 그날 관원을 보내 교(郊)와 종묘에 제사지내 고하였습니다. 황상이 구중 궁궐 깊이 거처하며 정양하느라 신민을 접견하지 않은지 10여 년 이나 되었는데, 지금 심 각로(沈閣老)의 주청에 따라 억지로 나아오니, 뜰에 있던 군교(軍校)들 중에는 용안을 바라보고 눈물을 흘리며 축수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 >예부가 신들에게 상품을 의례적으로 하사할 것을 주청하니, 황상이 특별히 별지(別旨)를 내려, ‘국왕에게 마땅히 답례하는 하사품이 있어야 하니, 너희 부가 조사해보라.’ 하였습니다. 예부가 비로소 전례를 참고하여 다시 황상의 결재를 품하고 또 칙서를 줄 것을 청하여 곧이어 성지를 받았습니다. 당초에 예부에서는 만력 31년에 흠사(欽賜)한 예를 상고해서 아울러 성지를 품했어야 옳을 것 같았는데, 방치해두고 살피지 않은 채 단지 배신 등에게 상품을 하사할 것만 청한 것은 크게 결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조사해보라는 명이 특별히 성은에서 나왔으니, 본국을 돌아보고 생각하시는 것이 지극하다고 하겠습니다. 평수정 등 포로를 바친 사유를 가지고 천하에 조서를 반포하였고, 신들은 흠사(欽賜)한 망의(蟒衣)와 채단(彩段)을 예부에서 받았습니다. 칙서를 올려 보냅니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205024_001|선조실록 113권, 선조 32년 5월 24일 신미 1번째기사]] >지난번 동이(東夷)의 소추(小醜) '''평수길(平秀吉)'''이[* 도요토미 히데요시] 외람되이 하례(下隷)로서 감히 환란의 단서를 일으켰다. 예봉(裔封)을 점거하고 제도(諸島)를 예속한 다음 끝내 침식할 뜻을 일으켜 우리 내부(內附)의 나라를 엿보았다. 그리하여 이기(伊岐)·대마(對馬) 사이에 사나운 고래가 기세를 부렸고 낙랑(樂浪)·현도(玄菟) 지경에 칼날이 교접하였다. 군신이 도망을 치고 인민이 이산되자 주문(奏聞)을 올려 급박한 사정을 고하므로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구원하게 하였다. 조선은 대대로 공순하다 일컫는 나라인데 마침 곤액을 당하였으니 어찌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 만약 약자를 도와주지 않는다면 누가 그 은덕에 감화할 것이며, 강자가 죄벌을 도피한다면 누가 그 위엄을 두려워하겠는가. 더구나 동방은 곧 팔다리와 같은 울타리이고 이 적은 문정(門庭)의 적인데이겠는가. 그 난을 막고 난리를 평정하는 것이 나 한 사람에게 달려 있는 터이라 이에 일대(一隊)의 군사를 명하여 정벌하게 하였다. > >평양의 한 차례 싸움에 교만한 적은 이미 낙담하였건만, 적은 견고함을 믿고 갖가지 꾀를 부리면서 겉으론 순종하나 속으론 역심(逆心)을 품었다. 본심은 해치려 하면서도 짐짓 애걸하는 태도를 지었다. 그리하여 책사(冊使)가 귀환하지도 않았는데 흉적의 위엄이 다시 치성해 졌다. 이에 짐은 그들의 교활함을 통찰하고 홀로 마음속으로 결단하였다. 곧 군국(郡國)·우림(羽林)의 인재를 선발하고 돈을 주거나 벼슬을 주는 포상을 아끼지 않았다. 기필코 훼복(卉服)121) 을 일소하고 해파(海波)를 맑게 하려 하였더니 천지의 홍은(鴻恩)과 종사의 은덕을 힘입어 신이 벌을 내려 적의 괴수를 죽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수륙(水陸)으로 동시에 구축하고 정병과 기병을 아울러 쓰면서 길을 네 갈래로 나누어 일심으로 협력하여 그들의 마초와 군량을 태우고 소굴을 공격하니, 밖의 후원도 끊기고 안으로 계책도 없었다. > >이에 동악(同惡)이 섬멸되고 군추(群酋)가 도주하였다. 전선(戰船)은 모두 맹렬한 불길에 휩싸여 바닷물이 끓어 올랐고 버리고 간 무기가 산처럼 쌓여 전진(戰塵)이 일소되었다. 비록 오랫동안 교만을 부린 적이라 하나 하루아침에 남김없이 소탕하였다. > >홍안(鴻雁)이 돌아오니 기자(箕子)의 봉한 나라가 여전하고, 웅비(熊羆)가 회군(回軍)하니 한가(漢家)의 위엄과 덕화가 전파되었다. 노획한 적의 수급(首級)을 모아 경관(京觀)을 만들어 '''평수정(平秀政)''' 등 61인을 잡아들여 사형을 집행하고 그 머리를 천하에 조리돌려 길이 흉역의 경계를 삼고 쾌히 신인(神人)의 분심을 씻어버렸다. [[http://sillok.history.go.kr/id/kna_13208009_003|선조실록 116권, 선조 32년 8월 9일 을유 3번째기사]] 명에 사은사로 간 한응인 일행이 평수정 등 61인의 포로를 [[만력제|명 황제]]에게 압송했더니 [[만력제#s-4|황제가 궁에 틀어박혀 신민을 접견하지 않은지 10년이 지났는데]] 심 각로의 주청에 따라 억지로 나오니 뜰에 있던 사람들이 황제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다. 황제가 평수정 등 포로를 바친 일을 가지고 천하에 조서를 반포하였고 한응인 일행에게 칙서와 하사품을 내렸다. 평수정 외 61인을 사형에 처하고 머리를 천하에 조리돌렸다는 내용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